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문단 편집) === 국가대표 경력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디스테파노.png|width=100%]]}}} || || '''{{{#fff 디 스테파노의 도움 기록은 아르헨티나 출신의 빅사커 유저가 옛 신문을 뒤져가며 찾은 것이다. 해당 유저는 신문에서 골 장면을 묘사하는 장면들을 세세히 분석하며 찾으며[* "후반 23분 디 스테파노가 올린 크로스를 [[프란시스코 헨토]]가 오버헤드킥으로 선제골을 넣었다"라는 문장처럼 당시 경기 과정이 나오는 신문을 분석해서 어시스트 기록을 찾았다. [[https://twitter.com/Trachta10/status/1588631428048515072?cxt=HHwWgMDTvb33-YssAAAA|참고]]] 디 스테파노의 어시스트 기록을 찾았다고 한다. 다만 묘사가 안 된 부분들도 상당히 있어 아래 수치는 최저 수치이고 실제로는 좀 더 많을 수도 있다고 한다.}}}''' || 1947년 21세의 나이에 현재의 [[CONMEBOL 코파 아메리카|코파 아메리카]]의 전신인 남아메리카 챔피언십에 출전해 6경기 6골 3어시스트로 아르헨티나 대표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다음 대회인 1949년 남아메리카 챔피언십과 1950년 월드컵은 브라질에게 유치 경쟁에서 패한 아르헨티나가 불참을 선언하는 바람에 나가지 못했다. 이후 디스테파노는 콜롬비아로 국적을 변경했지만 1954년 월드컵은 피파에서 참가를 막았다. 그렇게 거의 10년 만인 1957년 디스테파노는 스페인으로 국적을 변경했고 1958년 월드컵 예선전을 뛰었다. 그러나 스페인은 한수 아래로 여겨진 스코틀랜드에 잡히는 바람에 예선 탈락했다. 1960년 [[UEFA 유러피언 챔피언십]]이 창설되고 예선에서 디스테파노의 스페인은 폴란드와 대결했다. 폴란드를 상대로 2경기 3골을 넣으며 팀을 최종 예선까지 이끌었고 경기에서 스페인은 최종 예선에서 소련과 대결했다. 그러나 [[프란시스코 프랑코]] 정권 하의 스페인이 소련 원정경기를 거부하면서 결국 유로 1960 본선행 티켓은 소련이 가져갔고, 이것이 스노우볼이 되어 소련은 유로 초대 챔피언까지 올랐다. 이후 1962년 월드컵 예선에서 스페인은 웨일스를 만났고 디 스테파노는 2경기 1골을 기록하며 최종예선으로 스페인을 올렸다. 최종예선에서 스페인은 모로코[* 당시 월드컵 예선은 유럽 국가와 아시아, 아프리카 국가가 오늘날 플레이오프 형식으로 치루는 형식이었는데, 아시아의 한국은 유고슬라비아와, 아프리카의 모로코는 스페인과 대결했다.][* 놀라운 사실은 스페인과 모로코는 인접국이면서 이 두 번의 경기를 끝으로 무려 57년 동안 대결한 적이 없었다. 2018 월드컵에서야 다시 만났고 이후 2022 월드컵에서도 재차 만났다.]를 만났고 디스테파노는 1골 1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스페인의 본선진출을 이끌었다. 당시 스페인은 [[카테나치오]]의 개발자 [[엘레니오 에레라]] 감독이 이끌며 여기에 [[페렌츠 푸스카스]], [[프란시스코 헨토]] 등이 뛰는 초호화 팀이었다. 그러나 디 스테파노는 대회를 앞두고 부상당하는 바람에 끝내 월드컵에는 단 한 번도 출전하지 못하는 비운의 선수가 되었다. 스페인은 이 대회에서 펠레가 빠진 브라질을 상대로 거의 일방적으로 몰아 붙이다 헨토의 골이 취소되는 오심으로 아깝게 떨어졌는데, 만약 디 스테파노가 스페인에 남았다면 1962 월드컵의 양상은 전혀 달라졌을지도 몰라 매우 아쉬움이 많은 대회로 남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